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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웅의 이름이야기-최승노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14.06.09 09:25

고려 초기 재상 최승노(崔承老, 927-989)

   
▲ 신동 정보작명연구원장
신라말기927년에 서라벌의 한 마을에서 원보라는 벼슬자리에 있는 최은함(崔殷含)이 나이가 많도록 아들이 없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 앞에서 내외간에 간절한 기도를 드렸더니 아들을 낳았다.
늘그막에 오래 동안 빌고 빌어 얻은 아들에게 승노라는 이름을 지었다. 석달이 되지 않아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침임 해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경순왕은 이미 기울어져버린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스란히 송도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넘겨줬다. 은함은 가솔을 이끌고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대성(大姓)이 됐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해 글을 곧잘 익혔던 최승노는 태조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나이 12세에 태조 앞에서 ‘논어’를 자신 있게 줄줄 외었다. 태조는 기특해 상을 내리고,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생으로 보내 학문을 닦을 수 있도록 했다.
943년 5월 태조 왕건이 세상을 떠나자 최승노는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을 비롯해 정종, 광종, 경종을 거쳐 6대 정종에 이르기 까지 다섯 임금을 모셨다. 사회의 개혁과 대중국관의 시정 등에 대한 시무책 28조를 올려 고려왕조의 기초 작업에 큰 공으로 세웠다. 광종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관들의 제복을 직위별로 나눠 색상으로 구분했다. 성종원년에 최승노는 정광행견관어사상주국이 되어 어린 왕을 보필해 정견을 상고하여 문무 양반들의 생활보장과 신분을 보장했다. 문하성의 문하시랑평장사로 임명 됐을 때 성종은 시무책에 의한 12목을 설치하고 상주관으로 목사를 내려 보내 상주하게 했다. 이로써 중앙과 지방이 직접 연결돼 지방행정이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수문하시중을 거쳐 청하후(淸河侯)로 피봉됐을 때 굳이 사양하고 사직을 상신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영에 눌러 있다 63세에 그 일생을 마친다.
최승노의 부음을 전해들은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베 1천 필과 국수 3백석, 그리고 유향 1백량 등을 하사해 후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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