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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웅의 이름이야기 - 연개소문(淵蓋蘇文)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14.07.07 09:26

영광과 몰락의 재상 연개소문(淵蓋蘇文)

   
▲ 신동 정보작명연구원장
고구려 보장왕 때의 대장군으로 연개소문의 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祖)로 모두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스스로 말하기를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연개소문이라 했다고 한다. 성씨는 당나라 고조의 휘가 이연과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기 위해 뜻이 같은 천(泉)으로 바꿔 사용했다. 그의 동생은 연정토다. 개소문은 생김새가 씩씩하고 영특해 15세 때부터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영웅적인 기질이 장대해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 막리지 자리를 계승하려 하자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포악한 성품이 두려워 이를 반대하자 그는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간신히 승인을 받는다. 그 후 국정에 참여해 영류왕14년에 당나라 침공을 막기 위해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1천 여리를 이은 장성을 쌓아 국방시설을 보완했다. 여러 대신들은 그의 영웅적인 성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과 은밀히 논의해 그를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일이 누설됐다.
연개소문은 어느 날 병사들을 소집해 주찬을 성대하게 차려 놓고 여러 대신과 요인들을 초청했다. 대신들이 모이자 병사들로 하여금 모두 죽이니 무릇 그 수가 180여명이었다. 이어서 대궐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반대파를 모조리 죽이고 왕의 조카인 보장을 신왕으로 세워 스스로 대막리지가 돼 정권의 실권자가 됐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당 태종의 계속된 침공과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많아지고, 나당의 동맹으로 한강 유역에서 삼국의 분쟁이 심화하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강력한 지도노선은 더욱 경직된 정국으로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과 신라의 협공으로 평양까지 밀린 상황에서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그 직을 계승하고, 남건, 남산 등이 권력을 분권했다.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나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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