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안승웅의 이름이야기
안승웅의 이름이야기- 청백리의 사표 '황희(黃喜)'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14.08.04 09:01

   
▲ 신동 정보작명연구원장
조선 초기의 덕망 높은 문신이다. 가장 귀감이 되는 명재상으로 칭송을 받았다.

황희의 조상은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殿中監)을 지내다 관직을 그만두고 전북 장수현으로 이사해 살았다. 때문에 본관이 장수다.

 황희는 고려 공민왕 12년에 개성의 가조리에서 판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와 김우(金佑)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초명은 오래 살라는 뜻으로 수노라 했다. 자는 구부, 호는 방촌이며 시호는 익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함과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나 한번 보면 기억해 식객들은 이미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았다. 우왕 2년, 14세 때에 음직으로 복안궁녹사가 됐고, 21세에 사마시에 합격, 2년 후 진사시험에 급제했다. 27세에 창왕원년 문과에 급제해 이듬해에 성균관학록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392년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는데 조선 태조3년에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복직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게 됐다.

태종 1년에 승정원 지신사 박석명의 천거로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됐다. 43세에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제수됐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면서 태종의 신임을 얻게 됐다.

세자책봉에 반대하다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로 유배되고, 남원으로 이송됐다. 세종 4년에 참찬으로 복직되고,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발탁됐다. 이듬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한때 파주 반구정에 은거하다 69세에 영의정에 복직, 18년 동안 명재상으로 세종을 보필했다. 국정을 진정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과 외교를 안정으로 이끌어 태평성대를 이뤘다.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다. 또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했다.

특히 세종 말기에는 숭불과 유학자 중신간의 마찰을 중화시켜 왕을 보좌했다. 은퇴한 뒤에도 국가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참여했다.

갈매기를 벗 삼아 반구정에서 여생을 보내다 향년90세에 서거해 파주 탄현 금승리에 안장됐다.

익산열린신문  ikope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익산열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익산열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570-986 전북 익산시 목천로 283 201호(인화동 2가 90-3)  |  대표전화 : 063)858-2020, 1717  |  이메일 : ikopennews@hanmail.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전라북도, 다 01281  |  등록일자 : 2013년 10월 17일  |  발행인 겸 편집인 : 조영곤  |  청소년보호책임자 : 조영곤
Copyright © 2022 익산열린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