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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길을 유람 삼았던 ‘남구만’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16.10.10 10:03
신동 정보작명연구원장

본관은 의령이며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거북마을에서 아버지 남일성(南一星)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 태어났다. 자는 운로(雲路), 호는 미재(美齋), 약천(藥泉)인데 유배지인 강릉 약천샘물에서 따와 자신의 호로 삼았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5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별 문과 을과에 급제했으며 정언이 됐다. 1660년 이조정랑, 집의, 응교를 거쳐 대사간과 승지에 올랐다.

1668년 안변부사와 전라도 관찰사를 영임하고 함경도 관찰사로 전임해 유학을 진흥시키고 변방수이를 다졌다.

1679년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부 좌윤에 올랐으나 중앙정권을 잡은 남인의 윤휴, 허건의 탄핵으로 남해로 유배 길에 떠났다. 유배지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동인들이 모여 수학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횡포를 일삼아 왕의 미움을 받아 남인들이 실각하고 중앙정권은 다시 서인들이 잡게 됐다.

송시열과 더불어 유배지에서 풀려난 남구만은 도승지로 복귀했다.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에 오르면서 사군의 재설치를 주장해 무장, 자성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의 어지러움을 개선했다. 1684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됐다. 1689년에 기사환국이 발생해 서인들이 실각하자 강릉으로 유배됐다.

1699(1694년)년 갑술옥사 때에 영의정에 재임됐다. 1701년 희빈장씨의 중형을 주장하는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을 주장하다 숙종이 희빈장씨를 사사하자 충북아산으로 유배된다.

이후 유배와 파직을 등 파란을 겪다가 관직을 떠나 낙향해 약천초당을 짓고, 후진양성과 시문을 지으며 노후를 보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한 사람이 100여 명인데 최석정, 최규서, 박태보 등이다. 저서는 ‘약천집’이 있다.

생가는 충남 홍성군 구항면 거북로 406-23(내현리287)에 있고, 주위에 약천초당이 있다. 유배지인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심곡리 약천길65에는 약천사와 약천정이 있다. 경남 남해군 남해대로2745에 남해유배박물관에 영정이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 산1-5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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