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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신필 이삼만(李三晩)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16.12.05 10:56
신동 정보작명연구원장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창암 이삼만은 전북 정읍시 부전동 부무실에서 아버지 이지철(李枝喆)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규환(圭煥), 자는 윤원(允遠,允元)이고, 호는 창암(蒼巖), 강암(强巖), 강재(强齋) 등 이다. 초명은 규환이었으나 학문, 출사, 저술 등 세 가지가 늦어져 스스로 삼만으로 개명했다.

이삼만은 전주이씨 양반가(兩班家)의 후예지만 집안이 가난해 약초를 캐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어렸을 때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왕희지의 법첩을 중심으로 글씨를 연마하여 동국진체를 계승했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로 칡뿌리와 대나무 앵무새 털 등으로 붓을 만들고, 종이를 구하기 어려우니 옷감을 이용해 글씨를 쓰고 다시 빨아서 글씨를 썼는데 하루에 천자씩을 쓰고 잠을 잘 정도였다.

벼루 3개가 닳으니 해서와 행서, 초서에 능했고, 부단한 노력과 정진으로 창암체라는 독특한 유수체(流水體)를 남겼다. 24세에 부친이 뱀에 물려 돌아가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뱀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잡았다. 정읍지역에서는 축사장군(逐巳將軍), 벽사이삼만(壁蛇李三晩)등의 글씨를 써서 집안 기둥이나 벽에 붙이면 뱀들이 도망간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삼만은 50세 전후에 전주교동으로 옮겨 후학을 양성하고 서예연구에 전념했다. 만년에는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 마을에 살면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평생을 청빈하게 살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40년 가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길에 전주를 지나면서 한벽루에서 창암을 만나게 됐다. 중국에 까지 알려진 창암의 글씨를 한번 보고 싶었던 추사는 정중히 예를 갖춰 하필을 청하니 “붓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 한다”며 겸손하게 사양했다. 추사가 “사양하지 말고 붓을 잡아 주시오”라고 간곡히 청하자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夕過, 何日是歸年’이라는 두보의 오언절구를 일필휘지 했다. 추사는 이를 보고 “과연 소문대로 이십니다”라며 감탄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한 번 창암을 뵙고자 했으나 이미 고인이 됐기에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묘비에 비문을 지어 주었다. 생가 터 부근에 유필각자 암석이 있으며,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964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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