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목장 선친 피 물려받아 8년 전부터 나무에 예술 혼 새겨

다산·풍요 해학적 묘사 13가구 주민들 장승제로 화합 다져

전국에서 보기 드문 익산 유일의 ‘문화재급 장승깎이’가 여산면 두메산골에 살고 있다.

주인공은 신승식 씨(64). 그가 사는 곳은 태성리 관연마을이다. 천호산 자락 해발 300m에 위치한 산 아래 첫 마을. 13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중심부에는 저수지도 있어 풍경이 기가 막히다.

도인처럼 긴 백발머리를 뒤로 묶은 신승식 씨는 마을의 재주꾼. 술 한 잔 걸치면 상여소리, 엿장수 소리 등을 구성지게 잘 부르고 춤도 잘 춰 주민들을 웃게 만드는 마을의 비타민 같은 존재다.

농부인 그가 장승을 깎기 시작한 것은 8년 전. 우연히 여행 중 본 장승에 꽂혀 장승깎이로 변신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장승은 모두 14개. 이중 2개는 관연마을로 들어오는 길 양쪽에 세워져 있다. 이 장승들 가슴팍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글자 대신 ‘어서덜와’, ‘건강덜혀’라는 정겨운 전라도사투리가 새겨 있다.

나머지 장승들은 그의 집 앞에 있는 마을 공터 언덕과 저수지 옆 쌍둥이 정자 옆에 세워져 있다.

그가 매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1쌍씩을 만들자 주민들은 정월대보름을 기해 ‘장승제’를 열고 있다. 이렇게 연 장승제가 올해로 7회째다.

장승이 매년 늘어나면서 관연마을은 어느새 ‘장승마을’로 유명세를 탔고, 매스컴에도 여러 번 소개가 됐다.

지금도 농사지으면서 장승 깎고, 주민들에게 정자도 지어주며 여유롭게 사는 신승식 씨를 비가 촉촉이 내리던 광복절에 만났다.

‘대목장’ 피 물려받은 ‘천생 목수’

신승식 씨의 선친(고 신종래, 2004년 작고)은 근동에서 제일가는 목수였다.

1960년대 어느 날, 비봉면 문화류씨 재실 짓는 공사에 솜씨깨나 있는 목수 30명이 몰려들었는데, 서로 자기가 낫다고 싸움이 나자 문화류씨 종중이 시험을 치러 대목장을 뽑기로 했다. 통나무에 먹줄을 튕겨 큰 ‘자귀’로 정확하게 찍어내는 사람을 뽑는 것이었다.

나무를 켜는 것처럼 자귀로 찍어내는 기술은 웬만한 목수들도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의 선친은 정확하게 찍어내 목수들의 대장이 됐다. 이 얘기는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이다.

근동에서 옛날에 지은 집은 선친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다. 관연마을 모정도 선친이 지었는데, 못 없이 끼워 맞추는 ‘사각촉꽂이’로 지붕을 얹었다. 지금도 주민들이 쉬고 갈만큼 튼튼하다.

1954년 1월 24일 7남매 중 하나 뿐인 아들(누나 넷, 여동생 둘)로 태어난 신승식 씨는 어깨너머로 선친의 목수 일을 보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목수를 잇기를 바라는 선친의 뜻을 꺾고 14년간 외도했다.

여산초중학교, 이리공고를 나와 농사짓던 그는 ‘리비아 수로공사’ 인부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사를 뽑는 광고를 보고 요리학원을 다녔다. 조리사 자격증을 딴 후 충남 양촌 휴게소 음식점에서 일을 했는데, 7년 간 눌러 앉으면서 정작 계획한 리비아는 가보지도 못했다.

요리사를 그만 둔 그는 깻잎, 단무지, 가지 등을 절여 파는 식품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7년 만인 2001년 결국 부도가 나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왔다. 14년 만의 귀향이었다.

2004년 선친이 세상을 뜰 때까지 농사만 짓던 그는 2010년 장승 깎고, 정자 짓는 아주 특별한 목수로 변신했다. 대목장의 피를 이어 받아 천생 목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코 큰 장승’에 감명 장승깎이 인생2막

그는 2010년 우연히 전남 구례 여행 중 ‘코가 큰 장승’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한참을 넋 놓고 물끄러미 장승을 바라본 그는 “나도 깎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곧장 집으로 온 그는 장승을 깎기 시작했다. 처음엔 변변한 연장도 없고, 연장을 다를 줄도 몰라 어려웠다. 하지만 목수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인지 혼자서 터득했다. 또한 그만의 색깔 있는 장승을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8년 전 탄생한 첫 옥동자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코가 큰 장승. 높이가 3m, 성인 몸통만한 이 장승은 그의 집 앞 마을 한가운데 공터에 세웠다.

이듬해부터 매년 2개씩 장승이 세워진 공터는 장승동산이 됐다.

다산과 풍요를 해학적으로 묘사

장승의 포인트는 눈, 코, 입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라 무섭기도, 익살스럽기도 한다.

그는 천하대장군의 코를 크게 하거나, 혓바닥을 남자의 성기모양으로 표현하거나 지하여장군의 가슴을 풍만하게 하는 등 다산과 풍요를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승 하나 깎는데 걸리는 기간은 약 3개월.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작업은 일절금지다. 자다가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곧바로 작업. 날새기도 일쑤다.

장승 재료는 고사목이나 죽은 조경수다. 지금은 재료가 바닥나 작품 활동을 쉬고 있다.

간혹 장승 제작의뢰가 들어오지만, 예술품이 아닌 장식품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거절하고 있다.

‘1가구 1정자’ 목표 “술값이면 돼”

그가 ‘정자’도 짓게 된 것은 6년 전 마을 초입에 사는 친구 송영규 씨의 부탁을 들어주면서부터다. 비치파라솔 모양으로 가운데 기둥하나에 팔각정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무려 6개월 이상 공들여 지었다. 비용은 고사목 등 자재값과 술값, 담뱃값만 받았다.

두 번째 정자는 마을 뒷산 선친 묘 앞에 지었다. 절 입구의 일주문처럼 한옥지붕으로 꾸몄다. 세 번째는 주민 부탁을 받고 너와지붕을 얹었다.

지금까지 총 3개의 정자를 지은 그는 ‘1가구 1정자’가 목표다. 비용은 술값이면 된다고.

옛것 복원 ‘전통마을’ 조성 꿈

그는 마을자랑을 입에 달고 산다. 그의 말을 빌리면 고향인 관연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갑부네 마을.’ 부자가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뒤 고개에 얽힌 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관연마을 위에 있는 고개는 완주군 고산, 운주, 화산, 경천과 익산시 여산 등 5개 면 주민들이 여산장을 보러 넘어 다녔는데, 길이 끝없이 길고 경사가 심해 “숨이 가쁘다”해서 갑부네로 불렀다.

또 고개는 ‘큰 재’와 ‘작은 재’가 있는데, 큰 재 중턱은 ‘도둑놈 잔칫골’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전인 철종 때 도둑들의 기세가 관군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소와 돼지를 훔쳐 잡아 사흘 간 잔치를 벌였는데, 산허리가 넓게 파져 있는 곳이 바로 소와 돼지를 잡고 놀았던 곳이다.

그는 "장승을 깎고 세우는 것은 옛날에 마을에 세워져 있던 것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장승이든 정자든 자신만의 색깔 있는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가 장승을 깎은 다음부터는 마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7년 간 주민들이 모두 합심해 장승을 세우고, 정월 대보름 장승제를 열었다. 달집태우기도 하며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다졌다.

그의 주도로 2014년 3월엔 경로당도 세워졌다. 그는 출향인들의 협조를 구하는 한편 추석 때 벌초대행으로 번 돈을 기금으로 조성해 마침내 주민 모두의 쉼터를 만들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그를 통해 마을이 유명세를 타자 정부는 2016년 유휴공간 사업일환으로 관연저수지 옆에 쌍둥이 정자를 지어줬다.

주민들은 지난 7월 5일 전북도청 강당에서 열린 ‘제4회 생생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 나가 장승 세우기를 재연해 ‘경관, 환경분야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오랜 꿈은 ‘전통마을’ 조성. 옛 물건을 복원하는 만큼 상부상조하며 사이좋게 잘사는 마을을 만드는 게 진정한 꿈이다.

/글·사진= 우창수 기자

신승식 씨의 선친 고 신종래 씨가 지은 관연마을 모정.

생생마을만들기 콘테스트에 참가해 장승세우기 시연행사 때 쓰인 남성 성기 모양과 여성 가슴 모양을 한 장승.

우창수 기자  ikope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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