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중학교장

지난 주말, 미륵산을 향하여 뻗은 탑천 길을 따라 걸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부지런히 봄을 나르고 있었다. 이 기운에 취한 이름 모를 들풀은 어느 틈에 좁쌀만한 보라색 꽃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용해원 시인은 ‘봄 날엔’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나 보다.

/봄날엔/ 세상에/ 온통 사랑의 열기가/ 가득하다/ 저마다 자랑하듯/ 저마다 뽐내듯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 나도 사랑을 하지 아니하고는/ 못 견디겠다./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추위도 결국 봄 앞에서는 알몸이 되고 있다. 언 땅속에서는 생명이 숨 쉬고 희망이 움트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머지않아 지천에서 새로운 봄이 기지개를 켜고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따라 우리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저절로 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봄을 맞이하기 위해 나무는 더 깊은 물가로 뿌리를 내리고, 겨울이 다가오면 잎을 떨구고 추위에 견딜 채비를 갖춘다. 그래서 계절은 저마다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봄만큼 우리 마음을 부풀게 하는 것이 있을까. 겨울에 생장을 멈추고 모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때가 봄이다. 그러기에 색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여태 새 여름, 새 가을, 새 겨울이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봄은 혼자 몰래 오지 않는다. 항상 새 옷을 입고 화사한 차림으로 다가온다. 새봄. 그래서 새 기분으로 맞는 첫봄을 이렇게 칭찬했다.

봄은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 출발이라는 설렘과 희망을 더 예쁘게 전하고 싶을 때 봄이라는 포장지로 곱게 싼다. 청년을 봄에 비유하기도 한다. 청년을 청춘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새로운 싹이 돋기 시작하는 청춘은 아직 여물지 않은 낱알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인고의 시간일 수 있다.

문득 나의 청춘시절이 떠오른다. 잇따른 고입, 대입 시험에 낙방하여 크게 좌절한 시간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의 안방을 차지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그 뒤 주변에서 후기 인생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 봄은 채 봉오리를 피우지 못한 나에게 희망이 아닌 혹독한 시련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학과 공부와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 경험은 훗날 내가 교사로 새로운 삶을 열 때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부임 첫 해부터 담임을 맡았다.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무렵 대부분 학생들의 이름과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꼼꼼하게 기록했던 교무수첩이 한 권도 빠짐없이 책꽂이에서 키 재기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따금 제자들을 만나기 전에 그 수첩을 꺼내보며 지난 시절을 떠올린다. 가족관계, 교우관계는 물론 성적까지 화제에 올릴 때는 모두 토끼눈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그때가 교직을 시작하면서 느낀 봄날이었다. 요즘은 담임 맡는 것을 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선생님의 열정이 식었다고 탓할 수많은 없는 상황이 무척 아쉽다. 시간이 흘러 교감, 교장이 되면서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할 시간을 빼앗겼다. 대신 전교생의 담임이 되어 귀공자들이 신나고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학생 지도에 여념이 없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함께 짊어지려고 에너지를 쏟고 있다.   

이제 곧 개학이다. 나는 기대한다. 3월이 오면 지난 학년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 새 봄이 되어 찾아올 학생들을. 그들은 뽀얀 나이테 하나 더 두르고 그 품 안에 연둣빛 봄을 가득 담아 올 것이다. 아이와 청소년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이 어디 있겠는가. 초등학교 6년을 마치고 두려움 반, 호기심 반 부푼 모습으로 교문에 들어설 새 제자들, 한층 의젓해진 모습으로 진급하게 될 재학생들, 이 귀공자들이 꽃을 활짝 피우도록 선생님들은 방학 동안 꾸준한 연수를 통하여 자신을 닦았다. 더 쾌적한 환경을 갖추기 위하여 겨우내 추위를 무릅쓰고 시설개선에 수고한 선생님도 계셨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 학년 인사이동에 따라 방학을 촘촘하게 쪼개야 했다. 한 조각은 전 임지 마무리에 쓰고, 또 한 조각은 새로운 학교 설계에 그리고 나머지 몇 조각은 훗날 예쁜 봄꽃을 피우기 위한 밑거름으로 뿌려 두었다. 누구나 맞이하는 봄이지만 이렇듯 준비한 이의 봄은 더욱 푸짐할 것이다.

새 봄에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선생님과 귀공자들이 함께 꽃을 피울 것을 상상한다.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사람이 봄이다.

익산열린신문  ikope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익산열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