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중학교장

토요일 오후, 운동 채비를 갖추고 현관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 등록이 안 된 낯선 번호였다. 이 시간에 누굴까? 운동 가방을 반대쪽 어깨에 걸쳐 메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송태규 선생님이세요?” “네, 누구시죠?”
낯선 억양을 가진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온다. “지갑을 주웠거든요.”“그러세요?”이상하다. 방금 내 지갑은 있었는데. 대답을 하면서 분명히 조금 전 챙겼던 지갑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를 눌러보았다. 불룩한 내 지갑은 얌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갑 속에 선생님 명함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정ㅇ석이라는 사람을 아세요?”명함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언뜻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다. 잠시 머리를 굴려보다가 “글쎄요, 그런데 지금 거기는 어딘가요?”“영등동 어린이 놀이터에 있어요.”“그럼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그분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서 너 가지 질문을 나눈 뒤 놀이터 곁에 있는 도서관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하니 꼬마 둘을 데리고 젊은 엄마가 다가왔다. 남편이 도서관 1층에서 기다릴 거라며 두리번거리다 전화를 걸었다. 도서관 정문 쪽에서 나를 기다렸나 보다. 저쪽에서 남편인 듯한 젊은이가 다가왔다. 부부가 휴일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왔다가 주인 잃은 지갑을 발견하고 명함에 적혀있는 내 전화번호를 누른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흔치는 않겠지만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이 따로 있을까. 이 아이들이 다음에 이와 같은 일을 마주하게 되면 부모가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대로 따라 할 것이다.

요즘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어릴 때부터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학생들의 수가 상당하다. 이런 학생의 부모와 대화해 보면 십중팔구 그 집안의 환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고 함께 지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내 명함 두 장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하나는 교장 직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난달에 마무리한 4.4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익산 전국마라톤대회 대회장 명함이다. 요즘 교장실에 우리 학교 귀공자들이 자주 찾아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탕을 주고, 학생 수가 적다 싶으면 찻잔을 건네기도 한다. 아울러 덤으로 명함을 얹어 주면 교장 선생님 명함을 받게 돼 영광이라며 좋아한다. 그때마다 덧붙인다. “학교생활 하면서 어려운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전화해라.”

직감으로 이 지갑의 주인은 우리 학교 2학년 5반 학생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단골손님 가운데 그 학급 학생이 가장 많았으니까. 지갑 안에는 어머니 것으로 생각되는 독서 대출 카드 한 장과 학생 이름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 그리고 천 원짜리 사형제도 함께.

젊은 아빠에게 지갑 속에 있는 명함과 똑같은 내 명함을 건네며 다시 한 번 내가 그 학교 교장이라고 소개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디 사시는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었다. 여기가 고향은 아니고 우리 지역에 있는 특전사 대원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대뜸 나에게 철인 3종 운동하느냐고 묻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하며 어떻게 알았는지 되물었다. 내 목에 매달린 아이언 맨 목걸이를 보고 알았고, 자기도 철인 운동을 즐긴다고 했다.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것을 안 순간 더욱 친밀감이 들었다. 특전사 대원끼리 모여 철인 운동을 한다고 하기에 우리 클럽 훈련할 때 초대하기로 약속했다.

헤어지면서 인사를 건넸다. “김민수 특전사님! 장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다 깜빡 잊고 나머지 인사를 마저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김민수 상사님! 그 집은 부창부수입니다. 아이들도 훌륭한 부모 닮아서 꼭 멋진 일꾼이 될 겁니다.”

덕분에 운동시간은 늦어졌지만 화창한 날씨만큼 내 마음 밭에 꽃들이 만발한 주말 오후가 됐다. 원광중학교 귀공자들아! 앞으로 지갑 안에 교장 선생님 명함 한 장 정도는 챙기고 다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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