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중학교장

지난여름에 이사를 했다. 한쪽 구석에 방치돼 잡초만 자라고 있는 커다란 화분 서너 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버리기 아까워 풀을 뽑아내고 이삿짐 트럭에 실었다. 새집 테라스에서 딱히 심을 것이 없다 보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 전 테라스를 정리하다 아내와 비어있는 화분에 뭐라도 심어볼까 상의를 했다. 바로 시장으로 갔다. 여러 종류의 애기모종들이 방실거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화분에 키울만한 상추, 아욱, 쑥갓 모종을 담았다. 집에 오자마자 자리를 잡아주었다. 혹시 바람에 넘어질까 봐 뿌리를 꾹꾹 눌러 심었다. 요사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채소 생각이 나서 테라스에 나갔다. 시들지 않고 제법 척추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마치 키 재기 하듯 옹기종기 모여 나를 맞이했다.

물을 뿌려주었다. 흠뻑 적셔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세례에 놀란 듯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행여 뿌리를 드러내며 누울까 봐 조심스럽게 물을 주었다. 다행히 흙이 패이지는 않았다. 지금 흔들렸지만 잠시 누웠다 다시 설 것이다. 채소는 땅속에 심지를 내리고 직립해야 한다. 온몸으로 적당한 수분과 햇빛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싱싱하게 하늘로 팔을 뻗을 수 있다.

며칠 전, 상담부장 선생님이 교장실에 왔다.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많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3학년 학생 서너 명이 있다고 했다. 모두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지난 1학기에 그 반 분위기가 산만하다고 여러 선생님들께서 이야기했다. 틈을 내 교실에 들어갔다. 한 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하고 함께 하는 시간이라 자세를 갖추려고 애쓰고 있었고 몇몇은 비스듬히 또는 엎드려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애타는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 얼마간은 태도가 좋았지만 다시 제자리걸음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교장선생님이 그 학생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시간을 가지면 어떨지요?”상담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이니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좋겠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좋습니다. 그 녀석들이 저하고 함께 가자고 할까요?”일단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교장 하고만 가기는 부담스러웠는지 상담 선생님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정을 살펴 날짜를 정했다. 자전거를 가지고 다섯 명이 교문 앞에 모였다. 준비할 때 자전거 나들이인 만큼 안전모는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요사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안전모를 쓰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다 자전거를 이용해 등하교하는 학생이 있다. 이들 대부분이 안전모를 쓰지 않고 손잡이에 걸고 다닌다. 귀찮거나 헤어스타일이 구겨진다는 이유를 댄다.

함께 사진을 찍은 다음 출발하기로 했다. 한 학생이 안전모를 머리에 얹고 있었다. 잘 쓰고 출발하자고 했더니 얼굴 표정이 굳으며 찬바람이 불었다. 턱 끈이 맞지 않아서 못 쓴다고 했다. 핑계인 줄 알지만 은근히 화가 났다. 턱 끈을 조절해 주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함께 행동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출발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녀석들과 어떻게 해야 한 덩어리가 될까. 날개를 펴지 못하고 퍼덕거리는 이에게 누군가 툭 건드려 주면 힘이 되기도 하는데.

일단 내가 앞장서서 학생들을 가운데 두고 상담 교사가 후미를 맡았다. 신호등을 철저히 지키며 도로 가장자리에 붙어 일렬로 달리도록 신신당부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들이 자전거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한 시간쯤 달려 약수터에서 잠시 쉬어갈 때였다. 도착하는 순서대로 이름을 부르며 안아주었다. 자전거 타는데 아주 소질이 많다는 칭찬과 함께 나중에 철인 3종 운동할 생각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토닥여주었다. 빙그레 웃는 모습이 여지없는 봄날이었다.

학생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선생님이 해야 할 당연한 일 가운데 하나다. 학생들 수가 많고 수업을 담당하지 않으면 이름을 외우기가 쉽지 않다. 특히 교감, 교장이 되면 학생들과 직접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출발하기 전 이들의 이름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며 안아주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나 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어느덧 허기가 지름길로 왔다. 오늘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 선택권을 학생들에게 건넸다. 잠시 망설이다가 한 녀석이 호기롭게 말했다. “고기 먹어요.”“좋다. 오늘은 너희들이 먹고 싶은 대로 하자.”마침 근처에 음식을 잘하는 집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손님들로 붐볐다. 바쁜 시간에 삼겹살을 주문했더니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면서 그들에게 등을 내밀고 언덕이 되어줄 틈을 벌었다. 어디에 사는지, 좋아하는 운동은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부러워 보이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이야기가 오갈수록 얼굴 표정도 환해졌다. 3학년 2학기 내신 관리 잘해서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모델이 되고 기술자가 되고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꿈이 다양했다. 난 그저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만 끄덕여주면 됐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쫄면이 탄생한 비밀 아닌 비밀이 방송됐다. 냉면 제면소에서 한 직원이 실수하여 면발 기계를 잘못 조립했다. 가는 면발을 뽑아야 할 냉면 기계에 부품을 잘못 끼워 굵은 면발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 면발은 어차피 냉면 가게에서는 쓸모없는 불량품이었다. 버려야 하지만 삶아서 먹어보니 의외로 독특한 맛이 있었다. 그 회사는 쫄면 생산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쫄면이 탄생한 비밀이다.

쫄면도 이럴진대 누구든 이따금 환영받지 못하고 진가를 인정해주지 않는 곳에 설 때가 있다. 하지만 묵묵히 제 길을 가다 보면 쫄면의 맛을 알아주듯 기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채소가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나서 꼿꼿하게 서는지 모른다. 우리 학생들도 이 순간 바람에 흔들려서 뿌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였을 뿐이다. 부모님이 수분이 되어야 한다. 선생님이 햇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직립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꿋꿋하게 서도록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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