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경 에세이= ‘노을이 지면 키스를 한다’

한유경 연극연출가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늙은 모습의 주인공. 그 옆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펼쳐진 노을…. 온 몸으로 노을을 받아들이던 두 사람, 눈동자 가득 노을을 담고 키스한다. 노을이 지면 키스를 한다….’

언젠가 내가 써야할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야기의 처음, 중간 없이 생각난 마지막 장면, 영화 같은 느낌을 주지만 연극으로 사용할 장면이다.

연극을 하면서 즐거운 재미가 있다면 ‘역할놀이’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내가 아닌 수많은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는 역할놀이의 재미.

사실 내가 연극을 하면서 처음 맡았던 역할은 ‘방황하는 별들’이라는 작품에서 경찰서 철창에 갇혀 있으면서도 미팅 주선을 하는 ‘윤소자’역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내가, 내 안의 또다른 나를 찾는다는 도전의식을 가지고 맡았던 역할, 그 처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 아들, 딸, 그리고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 역할의 이름이 바뀌게 된다.

‘방황하는 별들’의 윤소자.

‘탑과 그림자’의 정신병자 할머니.

‘나도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의 리비.

‘신의 아그네스’의 아그네스.

‘노을이 지면 키스를 한다’의 노년의 할머니.

우리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언젠가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인생의 황혼기에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바로 이런 모습의 역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2020년,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익산열린신문 ikopen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