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맛

원광중학교 교장

교직에 첫발을 디뎠을 때니까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결혼하고 나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에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에 갔다. 그때는 승용차보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선생님이 훨씬 많았다. 시골에 가려면 갓난아이를 안고 버스를 타야 했다. 기저귀와 목욕용품, 여벌 옷을 챙기다 보면 어느새 커다란 보따리가 생겼다. 시골에 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2년쯤 지나서 둘째를 보았다. 아내와 내가 하나씩 보듬고 다니기에는 힘에 부쳤다. 아이들을 핑계 삼아 중고차를 샀다.

당시에는 5층짜리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살았다. 저층 아파트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뒷자리에 아이들을 태우고 나갔다 집에 올 때쯤이면 둘 다 잠에 취해있었다. 흔들어서 깨우면 잠투정하느라 칭얼대기 일쑤였다. 큰애는 눈치가 빨랐는지 5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째는 눈을 감고 떼를 썼다. 막무가내였다. 아이를 이길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안고 올라가야 했다. 속은 있었는지 찰싹 달라붙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어느덧 서른 위아래로 걸쳤다. 훌쩍 커서 집을 떠나 있는 녀석들을 이제 자주 볼 수도 없다. 고단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요즘은 결혼하기 전부터 자기 차를 운전하는 젊은이가 많다. 승용차가 필수인 셈이다. 이따금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 혹은 '이 안에 소중한 내 새끼가 있어요'라는 문구가 박힌 스티커를 붙이고 질주하는 차를 보게 된다. 대개 젊은 운전자들이 모는 승용차의 뒤 유리창 스티커에 쓰인 문구이다. 아이가 타고 있으니 조심하고 양보해 달라는 의미로 붙였을 것이다.

이것이 원래는 사고 났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아이들은 좌석 밑으로 끼어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때 부모가 의식을 잃었다면 구조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하여 아이를 먼저 구조해 달라는 의미로 이와 같은 스티커를 붙였다.

어느 날 미국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부모가 이틀 만에 의식을 찾았다. 깨어나면서 엄마가 "아이는?"이라고 말하자 경찰이 당황해서 폐차장을 찾았고 뒷자리에서 사망한 아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 유아용품회사에서 캠페인으로 ‘Baby in car’ ‘Baby on board’ 등과 같은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다.

엊그제 운전하면서 눈길을 잡아매는 문구를 보았다. ‘위급할 때 안에 있는 아이를 먼저 구해주세요.’ ‘여자아이, Rh+ AB형’, ‘남자아이, RH+ A형‘

사람들이 독하고 매운맛에 익숙해졌다. 경쟁하듯 점점 투박하고 자극적인 것을 좇는다. 순한 맛은 낄 자리조차 없다. 이럴 때일수록 사랑의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순한 맛으로 다가가면 좋겠다. 미물도 자신이 낳은 새끼는 온몸으로 보호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까칠한 아이를 키우는 나도 성깔 있으니 조심해서 운전해라’라는 매운 냄새를 풍기는 경고성 문구를 보다가, 한없는 부모의 사랑이 전해지는 순한 맛을 내는 문구를 보면서 느낌이 사뭇 달랐다. 어차피 아이를 위해서 차량에 붙이는 것이라면 거칠고 매운맛보다는 이처럼 가슴에 울림이 있는 순한 맛을 선택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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