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염치와 오만함

심지창의·융합교육원 대표

한글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통일전망대에 다녀왔습니다. 봄은 땅에서부터 오고 가을은 하늘에서 먼저 온다더니 하늘이 참 높았습니다. 시리게 맑은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저 멀리 철도가 북을 향해 누워 있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철길은 애를 태우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 있을 겁니다. 어서 남과 북이 이질감을 해소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기운으로 끊어진 철길을 잇고 마음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툭 터진 북쪽을 향해 비둘기 떼가 날아갑니다. 새삼 새가 부럽기도 합니다. 아쉬움을 남기며 주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복판에 세워둔 덩치 커다란 관광버스 옆구리에 눈길이 박혔습니다. ‘대한민국 피로회복제 OOO’라고 씌어있는 어떤 제약회사 음료 광고판을 큼지막하게 달고 있습니다. 회복은 원래 상대로 돌이킨다는 말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그걸 마시면 대한민국이 피로를 회복한다는 겁니다. 기운이나 체력이 떨어지면 회복해야 합니다. 남과 북처럼 멀어진 관계도 좋았던 시절로 회복해야 하고요. 무리한 간밤 숙취는 해소하거나 제거해야지요.

스트레스와 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트레스를 회복한다면 지나가던 소가 웃습니다. 스트레스는 당연하게 해소한다고 합니다. 피로도 그렇고요. 어제 출근길에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가 ‘피로회복’에 좋다는 음식을 소개했습니다. 순간 제 입으로 웅얼거렸습니다. 그냥 피로회복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이제 피로 해소라는 말이 어색할 지경입니다. 제약회사 가운데 비교적 대기업에 속하는 그 회사가 이걸 모를 리 없지요. 그 회사는 마시는 사람의 피로를 풀어 줄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피로한 상태를 지속시켜 많이 팔면 된다는 수작입니다.

우리 사회는 영어 철자 오류나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쓰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온통 호들갑입니다. 문제는 대기업 광고나 상호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연시하는 우리의 무관심에 도리어 화를 내어야 할 지경입니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국립국어원의 태도입니다. 사람이 많이 사용하면 심지어 어법 오류나 비문과 같은 표현도 관용(慣用)이라는 말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뜻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사용하면 원칙이고 뭐고 필요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가 필요합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기업이든지 기업을 유지하기 위한 이윤 추구 활동 이외에 법령과 윤리를 준수해야 합니다. 아울러 이해관계자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책임 있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원래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한 존재로만 있었지만, 이제는 돈을 버는 것 이외에 환경, 빈곤 등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영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기업의 윤리의식이 희박하거나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시장과 사회로부터 신뢰를 상실합니다. 결국, 기업의 생존 자체가 위태롭게 됩니다. 이때 ‘윤리적 책임’이란 법으로 강제하지는 못하지만, 기업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윤리적 수준 이상으로 경영활동을 펼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기업의 윤리적 책임에는 눈감고 귀 막으며 이익만 많이 남기면 그만이랍니다. 아니, 새로운 언어 질서를 만들었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을 겁니다. 그 몰염치와 오만함에 이렇게밖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그 제약회사 제품을 멀리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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