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겯고 살기

심지창의·융합교육원 대표

가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가을인가 싶더니 시월 가운데 올해가 6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했다고도 한다. 나무를 치장했던 잎이 비바람에 흔들리며 수북하게 쌓였다. 옷장 안에 갇혀 있던 가을옷은 미처 햇볕 한 번 볼 수도 없었다. 퇴직하면서 사무실 한 칸을 마련했다. 말이 거창해서 사무실이지 집에서 빈둥거리기 싫어 글 쓴다는 핑계로 도피처 삼은 해방구인 셈이다.

간단한 집기는 갖추어져 있었다. 한쪽 모서리에는 에어컨도 있었다. 그동안 켤 일도 없었지만, 문제는 냉방 전용기라는 거였다. 새로 나온 냉난방기를 사자니 부담스러웠다. 여기저기 중고 가전제품 파는 곳에 전화를 넣어 봤지만, 원하는 것은 이미 동이 난 뒤였다. 적당한 물건이 들어오면 연락해 달라고 전화번호를 남겼다. 며칠 뒤 한 군데서 소식이 왔다. 1년밖에 쓰지 않은 제품이 있으니 보고 가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가격대와는 차이가 났지만 다른 사람 차지가 될까 봐 망설일 수 없었다. 일단 계약부터 했다.

실외기를 설치하려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낭패였다. 전기 시설이라 하는 수 없이 토요일로 미루었다. 다행히 비가 멎었다. 주인을 포함해서 세 분이 왔다. 모두 나이가 지긋했다. 내가 서두르는 바람에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다. 2층 난간에 실외기 세울 공간이 옹색해서 작업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선뜩한 날씨인데도 모두 이마에 땀이 배었다. 서로 농을 건넸다. “형님은 겨울인 데도 왜 이렇게 땀을 흘리요?” “몸이 부실하고 곯아서 그렇지.” “그러니 술 좀 작작 마시세요.” “니가 사주고 나서 그런 소리 해라.” “그럼, 일 마치고 낮술부터 한잔합시다.”

일이 고되다 하지 않고 몸이 곯아서 그렇다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꼼꼼하게 마무리해주었다. 그분들이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동안 나는 멀거니 지켜보다 따끈한 차를 끓여 냈다. 정상 작동을 하는지 스위치를 누르자 잠시 후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사무실이 금세 훈훈해졌다. 일을 마치고 차를 대접하는데 이미 식어버렸다. 내가 미안해하자 한 분이 말했다. 마시기 좋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주말 이른 아침부터 고된 일을 하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으셨다. 내 마음이 한결 편했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중학교를 마무리하면서 고등학교 시험에 낙방했다. 초등학교 때 제법 공부 좀 한다고 으스댔었다. 그런 아들을 인근 도시로 유학시켰던 터라 부모님 뵐 염치가 없었다. 후기 고등학교 시험 준비 때문에 쥐 죽은 듯 골방에 박혀 지냈다. 외롭고 막막했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 나이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그때 나 혼자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힘이 되어주셨다. 돌아보면 여태 살아 온 것도 누군가가 늘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분들 덕분에 꽃이 피고 지는 걸, 햇살이 눈 부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까지 왔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있다. 두려움보다는 즐거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 길을 가고 싶다. 난방기에서 뿜어내는 바람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온기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비록 지금 잎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잊히겠지만, 둥치를 키운 나무는 머지않아 새잎을 돋울 것이다. 오늘 서로 어깨를 겯고 애써주신 분들 덕분에 사무실에서 맞이하는 첫 겨울은 훈풍이 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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