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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규 칼럼=지천이 봄송태규의 열린칼럼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22.04.22 08:59

지천이 봄

심지 창의·융합교육원 대표

늦은 아침에 힘들게 눈을 떴다. 지난밤 과음 탓이다. 어제뿐만이 아니다. 요사이 맞이하는 밤이 거의 그랬다. 자제해야 한다는 건 마음뿐이다. 은근히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다. 커튼을 젖혔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비를 짜내고 있었다. 이부자리의 유혹에 뭉그적대다 결국 아내의 불호령을 받았다. 구수한 냉이된장국 몇 수저를 넘기며 속을 달랬다. 식탁에 올라온 봄으로 아침을 해결한 셈이다.

그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정신도 깨울 겸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앞 산기슭에 뿌리내린 매화는 며칠 전 몸을 풀었다. 옷차림이 어설픈 나를 찾아왔을까. 돌아갈 곳 잃은 겨울 부스러기가 훅,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집에서 몇 걸음 옮기면 잘 가꾸어진 공원이 있다. 주말 늦은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 비 탓이든 날씨 탓이든 사람 구경이 동물원 동물 보기보다 어렵다. 덕분에 마스크를 내리고 물기를 머금은 공기를 맘껏 들이켰다.

한참을 걷다가 목적지를 정했다. 약 20분 거리에 구룡마을 대숲이 있다. 잘 가꾸어진 대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한반도 최대 대나무 군락지라고도 한다. 영화 촬영지로도 소문났다. 군데군데 밤낮 같은 모습을 한 영화배우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덕분에 사람들이 제법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저만치 대숲이 한눈에 잡혔다. 머리에 뿌연 안개를 이고 있다. 물결 모양을 한 산등성이가 병풍이 되어 숲을 에워싸고 있다. 대숲에 발을 디밀었다. 비가 오는 날 아무도 없는 대숲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온몸으로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댓잎에 앉는 빗소리는 어떨까’하고 우산을 접었다. 비와 대는 한 결이었다. 비는 허공을 그어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대는 뿌리 힘으로 하늘을 쓸어줄 뿐. 댓잎이 사뿐히 비를 받아주었다. 톡, 댓잎을 깨운 비가 파편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그 조각들이 고스란히 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내렸다. 오솔길로 점점 빨려들어 갔다.

발바닥에 밟히는 푹신한 댓잎 위로 뿌리가 엉켜 솟아있다. 마디가 단단해 보였다. 수많은 사람 발걸음을 받아주고 빗물에 씻겨 윤이 났다. 이렇게 굽은 뿌리가 대나무를 곧게 일으켜 세우는구나. 평생 흙을 움켜쥐며 마디가 굵어진 어머니의 열 손가락이 여기에 있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의 뼈가 녹으면 농촌 들판은 온통 분주해진다. 새벽부터 땅에 인사라도 하듯 농부의 허리가 논밭과 수평을 맞춘다. 땅은 가난한 농부의 숨결을 외면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갈퀴가 되어 흘린 땀방울 수만큼 수확으로 보답한다. 60년을 넘게 살면서 내 손으로 쌀 한 톨 길러낸 기억이 없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 나를 키운 부모님의 대나무 뿌리 같은 손가락 힘으로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다니 부끄럽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람이 댓잎 할퀴는 소리에 젖어 겉옷이 젖는지도 몰랐다. 뿌리처럼 얽힌 길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비는 멎었다. 대밭 밖으로 빼꼼히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과수원 둑에 빗방울을 머금은 홍매화가 눈을 틔우고 있었다. 성미 급한 꿀벌 한 마리가 수줍은 홍매화를 희롱하느라 바빴다. 젖은 몸에 한기가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이 봄은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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