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소고(溯考)

심지 창의·융합교육원 대표

그러니까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다. 부모님께서 사시던 시골집을 처분하고 시내 아파트로 나오신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다.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을 때 마을의 맨 위쪽에 터를 장만하시고 2층짜리 집을 지으셨다. 아래층은 창고 겸 다용도실로 쓰고 2층에서 생활하셨다. 마당도 꽤 널찍했다. 한족에는 잔디를 심고 예쁜 정원으로 꾸몄다. 건너편은 여러 가지 채소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텃밭을 일구었다.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어느 해였다. 여느 때처럼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갔다. 마당의 잔디밭이 온데간데없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검은 비닐을 뒤집어쓴 두둑이 줄지어 있었다. 깜짝 놀라 어머니께 여쭈었다.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 배춧값이 얼마나 한다고, 김장배추를 심으려고 그 아까운 잔디를 날려버리셨다는 말씀이다. 우리 어머니 참 알뜰하고 대단한 농사꾼이셨다.

당시 우리 집은 해마다 대략 600포기 이상 김장을 했다. 부모님과 5남매가 내놓은 김치통을 쌓아 놓으면 어마어마했다. 김장 날짜를 잡으면 며칠 전부터 부모님은 배추와 전쟁을 벌이셨다. 각자 따로 살림하는 자식들이 오기 전에 그 많은 배추를 손질해서 소금물에 담가 두셨다. 자식들 고생 안 시킨다고 몇 번을 헹구고 또 헹구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며칠 전부터 양념을 만드는 일은 어머니가 가장 정성을 기울이시는 일이다. 갖은양념 속에는 가족을 위한 땀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 토요일 오전에 모여서 가지런히 쌓아 두는 것은 우리 몫이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을 먹고 품앗이하러 온 동네 아주머니 서너 분과 김치를 버무리면 1층은 온통 울긋불긋 동네 가을 산을 옮겨다 놓은 듯했다. 어지간한 김치 공장 정도는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손수 운전을 못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병원이 가까운 시내로 이사했다. 그해 늦가을을 끝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김장은 막을 내렸다. 내년 김장을 어떻게 하느냐로 여러 말이 오갔다. 혹시 계속 한군데 뭉쳐 함께 하자고 할까 봐 며느리들은 어머니 눈치를 보면서 지레 겁부터 먹었다. 그 뒤부터는 각자 집에서 담가서 부모님께 드리고 서로 나누며 맛을 비교하기도 한다.

온 가족이 모여 종일 김장에 매달리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힘도 들었지만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기도 했다. 오후 서너 시까지 이어진 김장을 마무리하면 노곤하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근처 온천에서 몸에 밴 양념 냄새를 씻고 나면 날아갈 듯했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추억을 마음속에 고이 담아 두고 있다.

며칠 전 아침 밥상 앞에서 아내가 당부했다. 이번 주말에는 다른 약속 잡지 말고 집에 있어야 한다고. 그날 김장하는데 거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내가 배추를 사서 친구 집에서 간을 절여 오고 나는 배추에 색동옷 입히듯 골고루 양념을 칠하면 된다고 했다. 몇 포기할 거냐고 물으니 서른 포기를 절인다고 했다. 스무 포기 생각했다가 아들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해서 조금 더 늘렸다는 말이 따라왔다. 지난가을 결혼한 아들, 며느리 몫까지 챙겨야 하는 시부모가 된 것을 실감했다. 뭐, 수백 통도 했는데 그깟 서른 포기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절인 배추를 채반에 밭쳐놓고 밤새 소금물을 뺐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식탁으로 배추를 옮겼다. 배추를 통에 담는데 아내가 깜짝 놀란다. 배추 가운데 더러는 뼈대가 뻣뻣하게 살아있었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 일단 숨이 죽은 것부터 양념을 버무렸다. 나머지는 소금을 뿌려서 기세를 꺾기로 했다. 이럴 때 배추는 시퍼런 잎에서부터 노란 속살까지 소금을 먹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서툰 솜씨로 배추에 양념을 채우는데 내가 봐도 들쭉날쭉하다. 너무 많이 넣으면 양념이 모자란다며 손을 보태는 딸만도 못하다고 아내가 타박한다. 술이 남으면 안주를 더 시키고 안주가 남으면 술을 더 시키면 된다고 슬쩍 눙치면서 양념을 줄였다. 아니나 다를까. 양념이 상당히 남았다. 결국 배추 세 포기를 더 사다가 김장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아들 내외에게 줄 것은 따로 담아 놓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우리 손맛을 돌리는 기쁨은 김장이 주는 덤이다. 내가 쓰는 글도 간이 잘 배어 다소곳이 독자의 마음속에 스며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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