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피로현상

시인 심지창의융합교육원 대표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르고 33년 동안 교단을 지키고 살았다. 입만 있으면 됐다. 급하면, 아니 움직이기 귀찮아서 이것저것 시키는 습관이 몸에 뱄다. 직업병이다. 많은 양의 문서를 작성해야 할 일이 생기면 타자 치는 속도가 가장 빠른 학생을 불렀다. 어쩔 수 없이 시험 문제는 독수리 타법으로 해결하지만 여간 힘 드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남에게 시키는 일이 당연하다 보니 덕분에(?) 이 글을 쓰면서도 눈길은 화면 대신 자판을 헤매고 있다.

어릴 적 살던 집이나 학교는 화장실이 죄다 재래식이었다. 무더위가 한창인 한여름에 화장실을 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일단 숨을 참다가 코를 틀어쥐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렇게 조금 지나면 고약한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었다. 코점막에 냄새를 맡는 세포가 피로해지고 감각이 무뎌진다. 바로 ‘선택적 피로현상’ 때문이다.

철인3종 운동을 즐겨 한 지 20년이 다 된다. 열일곱 시간 동안 헤엄치고 자전거로 달린 다음 풀코스 마라톤으로 마무리하는 극한 운동이다. 최선을 다하고 진이 빠질 무렵이면 기진맥진이다. 밥맛도 달아나고 옆 사람과 말 섞을 기운조차 없다. 당연히 남의 말은 듣고 싶지도, 귀에 박히지도 않는다.

남 이야기는 안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살 수도 있을까? 그런 삶이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다. 요즘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그가 26년 검사 생활하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몸에 밴 직업병 때문에 나라가 온통 피로하고 혼란스럽다. 오죽하면 대통령 후보 시절 캠프의 대변인을 맡았던 이가 소셜 미디어에 “한 시간을 회의하면 59분을 혼자서 떠든다. 1분만 듣는다. 남의 얘기를 절대 안 듣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밑에서 참모들이 보좌하고 조언하는 것도 듣지 않고 자료를 줘도 공부하지 않는 이런 태도가 문제다. 원로들의 말에도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며 화부터 낸다”라는 글을 올렸겠는가.

그가 지난주 모 대학 학위수여식에 참석해서는 "기득권 카르텔을 깨고, 더 자유롭고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함께 실천할 때 혁신은 이뤄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귀를 의심했다. 기득권 카르텔을 깨다니. 그가 할 소리는 아니다. 기득권은 사전에서 ‘특정한 자연인이나 법인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획득한 법률상의 권리’라고 정의했다. 또한 카르텔은 ‘동일 업종의 기업들이 이윤의 증대를 노리고 자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되는 시장 독점의 연합 형태’라 했다.

그가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이 되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대통령실 복두규 인사기획관, 이인모 인사비서관,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까지 요직은 모조리 검찰 출신이 포진해 있다. 가히 검사 전성시대이다. 그것도 양이 안 찾는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 자리에 검찰 출신을 앉혔다가 하루 만에 낙마했다.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검사 출신을 꽂겠다는 발상부터 듣고 싶은 말만 듣겠다며 남의 말에 귀를 막은 결과다. 이보다 더 적나라한 검찰 기득권 카르텔은 소위 ‘듣보잡’이다.

이제 출범한 지 채 두 자리 달수도 안 된 정권의 국정운영 세포가 벌써 피로해졌다는 말인가. 지금 그 피로도는 온통 국민의 몫으로 지워졌다. 우리 국민은 이미 피로에 젖어 후각뿐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대, 부디 입 닫고 귀 세포의 감각을 깨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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