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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규 칼럼 - 모녀의 봄날 한 폭송태규의 열린칼럼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23.06.05 08:53
시인
심지창의융합교육원 대표

어디에서는 산수유가 피었다고, 매화가 몸을 풀었다고 온통 꽃소식 천지다. 퇴직하고 하루하루가 주말이다. 오늘은 면 소재지 약국에서 아버지 약 타다 드리면 딱히 바쁜 일도 없다. 약을 받아 가방에 넣고 금마 터미널로 향했다. 거의 다 왔는데 저만치 시내로 가는 버스가 꽁무니를 내뺐다. 다음 버스는 30분이나 지나야 온다.

정류장 한쪽에 시내버스 서너 대가 이마를 맞대고, 기사님들은 볕 좋은 곳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다. 모두 제 시각이 되어야 움직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자투리 시간이 많이 생긴다. 그냥 보내기가 아까워 가방에 보고 싶은 책을 넣고 다닌다. 다점심 때라 그런지 대합실이 텅 비었다. 책을 꺼냈다. 서서 책장을 넘기는데 바로 뒤에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통화하는 소리를 내 귀가 잡아챘다. 건너편 목소리도 또박또박 스피커를 타고 왔다. 또렷한 소리를 귀로 받아 적다 슬그머니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놓치지 않으면 둘 사이에 뭔가 건질 게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듣다 보니 친정엄마가 시집간 딸네 집을 찾아가느라 나누는 대화였다. 딸은 엄마 걱정, 엄마는 딸 건강 걱정으로 훈훈했다. 통화를 마치는 아주머니를 힐끗 바라보았다. 골 깊은 주름이 박혔지만, 입성*이며 표정이 넉넉하고 참 고운 얼굴이다. 둘밖에 없는 휑한 대합실에서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틈을 살피다 침을 두어 번 삼키고 나서 슬쩍 말을 붙였다.

“아주머니, 따님이 참 효녀같아요.”

흠칫 놀라며 뜬금없다는 듯 낯선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우연히 전화로 이야기 나누는 걸 들었거든요. 따님이 이 근처에 사시나 봐요?”

내 얼굴과 손에 든 책을 번갈아 쳐다보시더니 책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얼굴을 보면 어림없겠지만 책을 들고 있으니 그나마 상대라도 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책을 좋아하시는게 벼요?”

시답잖은 글을 쓴다고 하자 경계를 푸는 초병의 표정을 지으시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씀을 이어갔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학교 다닐 때는 이따금 글짓기상도 받아 오고 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에도 나가곤 했다. 커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딸을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꿈을 꺾지 못했다. 그러다가 딸이 쓴 글이 좋다고 죽자사자 쫓아다니던 청년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도 글을 쓴다고 건강을 돌보지 않아 병을 얻었고, 그런 아내와 두 아이를 둔 채 남편은 가정을 등졌다.

여기까지 말씀하시더니 아주머니 눈가가 잠시 젖었다. 덩달아 내가 어금니를 물었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번 물꼬가 터지자 아주머니는 당신의 마음을 줄줄 쏟아내셨다. 여전히 펜을 내려놓지 못한 딸은 요양 겸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내려와서 아이들과 잘 살고 지금은 건강도 많이 되찾았다. 무엇보다 딸이 건강해지고 근처에서 살아서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있으니 늘그막에 다행이라고, 그 재미로 행복하다며 금세 표정을 환하게 바꾸셨다. 이번에는 나도 고개를 주억대며 장단을 맞추었다.

일년내내 해만 뜨는 집이 어디 있을까. 상처가 없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런가. 그 생채기를 잘 치유하면 무지개 색깔 진주를 품을 수 있다. 따님이 펜을 꺾지 않고 영롱한 빛이 담긴 진주 같은 작품을 뽑아내길 바란다고 덕담 비슷하게 해드렸다. 이야기 마치길 기다렸다는 듯 딸네 동네로 가는 버스가 대기했다. 버스에 오르시는 아주머니 어깨 위로 봄 햇살이 눈에 부셨다. 난 그저 따사로운 봄볕 한 폭 끊어 저 모녀에게 선물로 드렸다.

*‘옷’을 속되게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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