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현장연구센터장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는 영국 북부 더럼(Durham)을 배경으로 한다. 석탄이 풍부해 산업혁명을 거치며 번성한 도시로 한때는 17만 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이곳에서 석탄을 캤다고 한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열한 살 소년 빌리의 아버지와 형도 광부다.

세월이 흘러 석탄 수요는 갈수록 줄었고 채산성은 떨어져 갔다. 1947년 석탄산업을 국유화한 지 30여 년이 지나 총리에 오른 마거릿 대처는 더는 탄광에 세금을 쏟아부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적자에 허덕이던 몇몇 탄광들의 문을 닫고 광부들도 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화는 영국정부와 탄광노조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부딪혔던 1980년대의 이야기다.

벌써 몇 번을 본 영화지만, 아빠가 되고 나서부터는 주인공인 빌리만큼이나 그의 아빠에게도 눈길이 갔다. 나도 어느덧 그와 엇비슷한 나이가 됐고 꼭 열한 살인 아들을 키우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막내아들의 꿈을 이뤄주려고 파업 현장을 빠져나오기로 한 빌리의 아빠는 동료들의 모욕을 묵묵히 견뎌내지만, 결국 뒤쫓아 온 큰아들과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낀다.

“우린 끝났어. 빌리에겐 기회를 줘야 하잖아.”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로얄발레학교에 오디션을 보러 런던행 버스에 나란히 앉은 아빠와 빌리, 빌리는 아빠에게 런던이 어떤 곳이냐고 묻지만 아빠는 런던은커녕 더럼을 벗어난 적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런던은 수도가 아니냐고 나무라듯 묻는 빌리에게 아빠가 입을 연다.

“런던엔 탄광이 없잖아.”

며칠 뒤 빌리에게 합격 소식이 날아들고, 아빠는 넋이 나간 얼굴로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른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 아들은 이제 겨우 한고비를 넘었을 뿐인데 말이다. 아마도 그 순간 그는, 막내아들 빌리 만큼은 광부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을 꿈꿔볼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던 자신과 큰아들과는 다른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을지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평생 더럼을 벗어나 본 적 없던 광부 아빠가 열한 살 막내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을지 모른다.

서울에서 태어나 수도권 대도시에서만 살다가 익산에 이사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아들에겐 서울ㆍ수도권을 벗어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코로나19가 잦아든 서울 명동에 다녀오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곳엔 익산에 없는 것들이 정말 많았다.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아들이 나중에 서울ㆍ수도권에서 누릴 수 있던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한 아빠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고.

최근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방의 9개 거점국립대에 서울대에 맞먹는 재정을 투입해 지방 학생들도 서울대 못지않은 교육을 받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은 돈과 명분 그리고 정치 리더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빌리가 더럼을 떠나지 않아도 로얄발레학교에 버금가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빌리 엘리어트>라는 가슴 시린 영화는 나올 수 없었겠지만 더럼의 더 많은 소년 소년들이 빌리만큼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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