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규 원광고등학교장

“형님,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달리기는 그만하고 감독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난 3월 18일 열린 동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자 후배가 내게 한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날 새벽  2시 알람소리에 번뜩 잠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준비해둔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가방을 멘 후 선잠을 깬 아내에게 출발을 알리며 가볍게 입을 맞춘다. 늦게까지 공부하다 잠든 하늘이가 깰까 살금살금 현관을 나서며 아내의 배웅을 받는다. 언제부터인지 달리다 힘들면 걸으라는 당부가 낯설지 않다. 나이와 건강을 생각해서 욕심내지 말라는 애정이 담긴 말임을 잘 알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이렇게 날 염려하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3시에 전세 버스로 출발 후 안성휴게소에서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다시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어느덧 광화문에 도착. 출발 준비를 하느라 버스 안이 부산하다.

서울 기온 6°C. 반소매 반바지 복장으론 약간 쌀쌀하다고 느끼며 총소리에 맞추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남들이 앞서간다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자고 다짐하며 20km를 지날 때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옆 러너들과 보조를 맞춘다.

그러나 30km를 지나면서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문득 2년 전 연습 부족으로 이 대회에서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후에도 풀코스 장거리 훈련은 하지 못한 채 마음이 앞서 신청했다. ‘설마 완주 못하랴’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이제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천리 밖으로 달아나고 ‘제발 제한 시간 안에 완주만 하자’라는 겸손한 생각이 가득하다. 등이 굽은 어르신, 몸이 무거워 보이는 젊은이, 아주머니와 아가씨들,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나를 앞질러 잘도 달린다. 후회가 막심하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했는데 이런 초라한 모습이라니.

35km를 지나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며 처음으로 몇 걸음 걸었다. 그것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절대 걷지는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나의 육신은 자꾸만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 허물어지고 허물어진다. 수많은 대회에 참가했지만 이번처럼 힘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이미 달콤함을 맛보았기에 계속해서 마음 속 악마가 손짓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사탕의 달콤함을 떨치지 못하고 저절로 사탕에 손이 가 엄마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처럼. 어느 새 정신과 육신은 서로 타협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저기서 조금 걷고, 남은 거리는 더 빨리 달리면 되지. 그럼 잃은 시간을 만회할 수 있어.’ 그럴수록 걷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냥 과감히 포기할까?’ 나 자신과 한 약속도 있지만 지난 주 학교장 특강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완주해서 여러분들 앞에 서겠다고 한 말이 떠올라 고개를 젓는다. ‘그래, 걸어서라도 제한 시간 안에 기어이 완주한다’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는 중에도 내가 만든 악마는 계속해서 사탕을 눈앞에 흔들며 유혹한다. 환희의 순간도, 고통스런 순간도 모두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했던가. 남은 거리가 아득히 멀다고 생각될 때마다 연습 때 달리던 곳의 구간을 머릿속에 그리며 힘겹게 위안을 삼는다.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하지만 영락없이 남들은 토끼걸음, 난 거북이걸음 꼴이다.

어느 덧 함성 소리와 함께 잠실 종합운동장이 눈앞에 보인다. 마른 수건을 비틀어 짜는 마음으로 트랙에 들어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다. 기록은 4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천근만근 몸으로 어쨌든 무사히 완주했다며 나를 위로한다. 마음만 앞서 연습 없이 무리하게 시도하면 몸이 상한다는 교훈을 온몸으로 느낀 하루였다. 오늘 함께한 3만5천 마라토너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2018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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