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을29 다이끄미

익산 청년시청 앞마당을 지나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면 나무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양쪽으로 전선도 길게 늘어져 있는 게 정말 어딘가로 전기를 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전봇대엔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1912년 익산역이 개통하고 역 앞 중앙동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동네 여기저기에 나무전봇대들이 세워졌는데 이 전봇대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100살쯤 먹은 전봇대인 셈이다.

무려 100년 동안 골목을 지키고 있던 전봇대가 아파트 건설에 밀려 사라지게 되자 시에서 전봇대를 뽑아 청년시청 한켠에 옮겨놓게 된 것. 멋스러운 나무 벤치도 가져다 놓고 벽에는 전봇대와 제법 잘 어울리는 그림도 그려 넣자 텅 비어있던 작은 공간이 제법 운치 있는 곳으로 되살아났다.

이 나무전봇대를 처음 발견한 이가 바로 전창기 강사다. 전 강사는 1980년대 미륵사지발굴조사단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35년간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등 여러 문화 유적의 발굴과 연구에 참여해왔다. 미륵사지를 시작으로 왕궁리유적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발굴조사가 막 확대되던 시절이었다. 얼마 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개소하면서 자연스레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무왕과 연관이 깊은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등의 발굴조사에 두루 참여하였다. 현장 경험과 발굴한 사료를 토대로 <알기 쉬운 미륵사지 당간지주>, <우리나라 온돌시설의 발달 과정>, <미륵사지 아름다운 문양> 등 논문도 여러 편 썼다.

“익산시와 여러 기관들에서 백제의 역사를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높은 시민 의식을 좇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익산이 가지고 있는 유산들의 역사적 가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잘 활용하려는 노력이 아쉽습니다. 제가 35년 동안 모은 사료들을 토대로 더 체계적인 교육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어요.”

그는 먼저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등을 찾는 이들이 만나는 문화관광해설사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 문화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이 전달하는 “콘텐츠들이 아주 오래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번 익산시 문화도시지원센터의 ‘문화마을29 컬처랩 – 익산을 부탁해’ 사업에 <익산천도, ‘무왕의 요럼에서 무덤까지’ 문화강좌> 프로젝트로 참여하게 되었다.

“문화해설사들도 미륵사지나 왕궁을 둘러싼 전체 스토리를 잘 몰라요. 그러다 보니까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막힐 수밖에 없죠. 익산은 무왕이 태어나고 죽은 곳이에요. 그래서 무왕이 태어난 마룡지에서 그가 묻힌 쌍릉까지 무왕의 전 생애를 좇아가면서 그의 일대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제가 현장에서 직접 발굴했던 사료들을 토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정말 사실인지를 확인해보는 재미도 있죠. 그래야 이해도 쉬워요.”

그는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지를 비롯해 고대 백제 유적을 발굴하면서 확보한 엄청난 양의 사료들을 가지고 있다. 2시간 강의에 사진만 400장을 보여준다고 하니 그 양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도 많다고 한다. 그는 “그런 자료들을 기반으로 전체 큰 그림을 가지고 스토리를 들려주는 게 제가 가진 강점이자 차별성”이라고 했다. 사료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인 셈이다.

이번엔 2시간씩 4회차 강의를 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자료와 이야기를 모두 풀어내려면 50시간은 필요하다고 했다. 답사도 10시간은 해야 하니 몇 달짜리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 이번 문화강좌에도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동안 꼬박 강의를 했는데도 아무도 졸거나 지루해하지 않았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불러주는 곳은 많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유적 발굴에 뛰어들었던 그는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평생을 발굴과 연구에만 매달린 탓에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는 익산 곳곳에 숨겨진 역사 문화 유산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익산에만 등록된 유적이 224곳이나 된다면서 “그만큼 많은 유적이 있음에도 별로 볼 게 없다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 동네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200개 넘는 유적 가운데 80곳 정도는 가볼 만한 곳들이에요. 하루에 10곳씩 다녀도 8일을 다녀야 할 만큼 많죠. 익산이 볼 게 없는 게 아니라 제대로 찾아내거나 가꾸지 못한 게 문제입니다. 시티투어라고 대형버스로 들어갈 수 있는 곳들만 갈 게 아니라 미니버스로 10명 정도를 데리고 다니면서 골목 구석구석까지 다녔으면 해요. 반나절 코스부터 하루 코스, 길게는 5일 코스까지 다양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네 구석구석의 문화까지 알리는 게 목표에요.”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다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나무전봇대를 여러 개 발견하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전봇대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그는 “오래된 전봇대에 불이 켜지면 낮에 보는 전봇대와는 또 분위기가 다르다”며 곳곳에 숨겨진 작은 재미를 찾아내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익산 시내에 아직도 이렇게 많은 나무전봇대가 있고, 또 실제로 쓰이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 참여자들도 무척 신기해했다. 그는 “동네에 숨겨진 작은 보석들에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 동네에도 제법 괜찮은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뽑는 익산의 숨겨진 작은 보석들은 무엇일까.

“제1공단에 가면 인간문화재가 운영하는 방짜유기공장이 있고, 솜리예술회관 옆에는 북이나 소고처럼 가죽으로 된 악기를 만드는 공장이 있어요. 익산에 아직도 이런 곳들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죠. 이런 근대 유산들도 익산의 훌륭한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미륵사지 주차장 옆에 있는 괴무덤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줬다. 지금은 흐릿해서 읽을 수 없는 글씨가 쓰인 비석이 하나 있는데, 미륵사 주지스님 행세를 하던 못된 쥐를 몰아낸 고마운 고양이가 죽어 묻힌 무덤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는 미륵사지 곳곳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어있다고 했다.

“‘익산문화사랑방’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서 내가 발굴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올려놓았어요. 익산 문화지도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혼자서는 벅차더라구요.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서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전창기 강사는 누구보다 익산을 사랑하고 또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가 적어도 자신이 가진 열정과 실력에 걸맞은 인정과 존중을 받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를 바란다.

익산열린신문  ikope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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