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 심지창의융합교육원 대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문구점에 다녀왔다. 올해 쓸 수첩을 골랐다. 수첩을 사용하는 이들은 이를 애첩쯤으로 여기며 말한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애첩을 만지는 감촉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미끈하게 광나는 것을 손에 넣으면 비밀을 숨긴 듯 가슴 설렌다고. 그래서 이 애첩을 들이고 나면 비로소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셈이다.

이미 십오륙 년 전부터 길들여 온 습관이다. 표지 안쪽에는 마음에 새겨 둘 글귀를 붙인다. 중요한 일정을 꼼꼼하게 챙기고 새해 결심을 적는다. 대개 작심삼일이라고들 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내 손으로 적어놓은 계획을 되새기면서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기도 하니 적지 않은 소득인 셈이다.

교직에 있으면서 33년간 꼬박꼬박 교무수첩을 기록했다. 담임을 맡으면 학기 초에 업무수첩을 채우는 기초 작업이 커다란 일과이다. 먼저 정성스럽게 명렬표와 사진을 오려 붙인다. 이어서 취미와 특기, 가족관계 등 각종 신상과 정보를 기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적의 변화까지 더해지면 학생을 상담하는데 든든한 자료가 된다.

이따금 졸업한 제자들의 초대를 받을 때가 있다. 나가기 전에 참석자들 파악이 필수다. 이어서 고이 보관한 지난 교무수첩을 뒤적인다. 당시 학번과 가정환경 정도는 머릿속에 꼭 담아가야 한다. 만나자마자 이런 걸 풀어놓으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모든 게 선생님의 기억력이 아니다. 수첩의 위력인 셈이다.

스마트폰 안에 별의별 편리한 기능이 다 있다지만, 여전히 스마트하지 못한 나는 구식을 고집한다. 남들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아직도 그런 걸 쓰냐며 구닥다리라고 놀린다. 구닥다리면 어떤가. 내가 편리하면 그만이지. 지금도 포털 검색보다 종이 신문을 고집한다. 넘길 때 펄럭이는 청아한 날갯짓 소리도 한몫한다.

수첩을 지니면 좋은 점이 참 많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메모할 수 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그 기분을 아는 이 몇이나 되려나. 서랍 속에 지난 수첩들이 나란히 키 세우고 있다. 이따금 그 수첩을 찾아 펼칠 때가 있다. 지난 발자취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귀한 시간이다. 메모를 보면서 당시를 떠올린다. 잘 지켜낸 일은 첫머리에 동그라미를 얹고 있다. 미처 실행하지 못했던 일에는 가위표를 해두었다.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소리 없이 왔다 간다. 생각이 깊어지면 늘 고민하고 머릿속에 맴돌던 것들이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떠오르기도 한다.ᆢ 그때 품에 안긴 애첩을 꺼내 기록해 두면 가히 보석 같은 글감을 되돌려 준다. 이렇게 정리한 수첩은 1년이 지나면 한 해를 잘 살아냈다는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 된다.

손때묻은 수첩을 열면서 지난해를 펼친다. 추수를 하는 셈이다. 들녘에 심은 곡식을 거두는 가을걷이 대신 얼마나 야무지게 살았는지 한겨울에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지나온 발자국이 켜켜이 담겼다. 새 수첩을 보면서 다짐한다. 내년 이맘때는 가위표 대신 동그라미를 얹은 일로 가득 채웠는지 되돌아봐야겠다고.

문득 내 생의 수첩을 생각한다. 어느덧 삼분의 이를 넘어섰다. 계산기를 두드린다. 지금까지는 이러구러 열심히 살아왔다고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 이제 직장을 다니던 때와는 다르게 평가 항목을 나누려 한다. 굳이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해야 할 일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면 된다. 새 수첩에 다가올 꿈을 그리면서 내게 충실한 하루하루를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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