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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규 칼럼 - 출필곡 반필면(出必考 反必面)송태규의 열린칼럼
익산열린신문 | 승인 2023.08.28 08:46
심지창의융합교육원 대표 /시인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난 선배들이 자신의 퇴임을 축하하고 위로한다며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몇 해 동안 코로나 때문에 온통 길이 막혔다. 퇴임하던 해 여름방학에 해외여행 대신 제주도에서 보름 살기를 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아내는 나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싶다는 말을 돌림 노래처럼 불렀다. 올 초에 아내가 자그마치 천만 원이라는 거액이 담긴 통장을 내밀었다. 내가 퇴직을 한 뒤 매달 50만 원씩 적금을 부어 마련한 목돈이라고 했다. 넉넉지 않은 생활비를 쪼개 거금을 마련한 아내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이번에 두 번째 시집 출간도 마쳤겠다, 명퇴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미루었던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출발 전날 아내와 부모님 댁에 들렀다. 점심을 마치고 안방에 누워계신 아버지에게 멀리 다녀오겠다고 출필곡하는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가 어디 가느냐고 입술을 떼셨다. “미국에 다녀올게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잘 다녀오라는 말씀을 보태셨다. 웃으면서 아버지 선물도 사 올 거라 했더니 고개를 저으신다. “용돈도 못 주는데 무슨 선물이여, 그냥 와.” 이렇게 이따금 아버지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런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놓지 못했다. 안방을 나오는데 뒤꼭지가 뜨거웠다.

초등학교 1, 2학년쯤 겨울 무렵이었다. 짚단을 옮기던 아버지가 경운기 적재함에 높이 쌓은 짚단 위에서 떨어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신 그날 안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동생들은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음 날 어머니를 따라 며칠 동안 아버지 병실에서 지냈다. 병원이 있는 시내 한복판은 밤이 되면 조명이 화려했다. 시골 촌뜨기가 밤마다 싸돌아다니는 재미에 아버지가 병원에 오래 계시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마당발이었다. 동네 대소사에 아버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 아버지께서도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하셨다. 서너 해 전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 신세만 지다가 치매까지 찾아왔다. 병구완할 손이 없다는 이유로 요양병원으로 모신 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할 거란 생각을 했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병실에 오래 계시기를 바랐던 철부지 시절 내 탓이라는 생각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쓰시던 옷장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나보다 체구가 작지만 단단하시다. 차마 버리기 아까운 옷은 내가 입겠다며 한쪽으로 빼두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 몸에도 맞지 않은 옷을 어떻게 입으려고 하냐며 만류하셨다. 옷 몇 가지라도 우리 집 장롱에 걸어두면 아버지의 가쁜 숨이나마 나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더하여 훗날 아버지가 안 계실 때 그 옷을 보면서 아버지의 체취라도 맡아 볼 생각이었다.

코로나19로 면회가 제한되고 어렵게 뵐 때마다 점점 말수가 적어지셨다.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다시 집으로 모셨다.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멀리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 댁에 들러 인사하기를 빠뜨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식들과 손주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아버지 얼굴이 환해지시고 조금씩 기억의 끈을 당기고 계신다. 어쩔 수 없이 침대에만 계시지만 더러 말씀도 하시고 손주들의 근황은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여행자이고 돌아갈 곳 없으면 방랑자이거나 나그네라 했다. 열흘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환한 얼굴로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렸다. 떠나기 전 출필곡하고 다녀와서는 반필면할 부모님이 계시고 내 몸 뉠 수 있는 집이 있으니 더 바라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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